지방 소멸과 로컬 정치: 사라지는 마을의 의사결정 구조
사람이 사라지는 마을보다 더 위험한 건, 의사결정 주체가 사라지는 마을이다. 지방 소멸은 단지 인구 감소의 문제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을이 스스로의 일을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시작된다. 전국 곳곳의 시골 마을에서는 이장이 고령화되거나, 아예 공석이 되는 일이 흔해졌고, 면 단위 행정은 광역화되면서 주민 의견 수렴 없이 결정되는 사안이 늘고 있다.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 마을은 점점 무기력해지고, 소멸의 속도는 더 빨라진다. 로컬 정치, 즉 주민이 자신의 마을에 대해 스스로 말하고 결정할 수 있는 구조는 지방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며, 지금 그 구조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지방 소멸과 함께 붕괴되고 있는 로컬 의사결정 시스템의 현실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어떻게 다시 세울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가능성을 탐색해본다.
지방 소멸 마을에서 사라지는 정치적 주체들
지방 소멸이 심화되는 지역일수록 주민의 정치적 참여율은 현저히 낮다. 이유는 단순하다. 더 이상 마을에 실질적인 결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강원도 A읍의 한 마을은 행정구역 통폐합 이후 이장직을 맡을 사람이 없어 선거가 3년째 열리지 않고 있다. 주민은 대부분 고령층이고, 회의나 문서 작업, 행정 절차를 감당할 인력이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방의회와 지자체조차 이런 마을을 ‘기능상 종료’된 행정단위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예산 분배, 공간 리모델링, 청년 유입 정책 등 핵심 결정들이 외부 행정기관에 의해 일방적으로 내려지고, 주민은 결정의 대상이자 객체로만 존재하게 된다.
이처럼 로컬 정치 구조가 무너지면 마을은 목소리를 잃고, 그 어떤 정책도 실효성을 가질 수 없게 되며, 결국 사람도 함께 떠나게 된다.
지방 소멸 지역에서 로컬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이유
로컬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주민 수가 적어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주민에게 권한이 주어지지 않고,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민총회가 아예 사라졌거나, 마을회관이 폐쇄되어 모일 장소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또한 중앙정부 주도의 공모사업 구조는 기획, 제안, 예산 집행 권한을 모두 외부에 두고, 주민은 그저 행사 인력으로만 참여하는 구조가 일반화되어 있다.
그 결과, 주민은 점점 ‘우리가 뭘 결정할 수 있는지’를 잊게 되고, 마을은 정치적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된다. 특히 40~60대의 ‘중간 세대’가 마을 정치에 진입하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다. 이들은 생업에 바쁘고, 기존 정치구조는 고령화되어 있어 자발적인 참여 유입이 불가능한 폐쇄적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이 모든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지방 소멸 지역은 물리적 인구가 사라지기 전부터 정치적 존재감을 먼저 상실하게 된다.
지방 소멸을 늦추기 위한 ‘로컬 거버넌스’의 재구축 전략
지방 소멸을 늦추기 위해서는 물리적 인프라 이전에 로컬 거버넌스 회복이 우선돼야 한다. 그 핵심은 ‘주민에게 결정권을 어떻게 다시 돌려줄 것인가’이다.
첫째, 마을 단위의 소규모 예산 자치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북 진안군은 1,000만 원 이하 소규모 사업에 대해 주민 총회에서 직접 안건을 만들고, 투표를 통해 예산을 배정하는 ‘우리 마을 한 표 사업’을 시범 운영 중이다.
둘째, 이장이나 통장 중심의 수직적 구조 대신 세대·이주자·소수자까지 포함한 참여형 의사결정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셋째, 디지털 기반 ‘로컬 의회’ 모델을 통해 주민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을 운영해야 한다.
이러한 구조가 실현되면, 주민이 다시 말하기 시작하고, 그 말이 정책으로 전환되는 선순환이 가능해진다. 로컬 정치가 회복되면, 마을은 단순히 남아 있는 땅이 아니라 주체가 있는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지방 소멸 시대, 마을의 정치적 자율성이 갖는 의미
지방 소멸은 결국 ‘선택의 문제’다. 주민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없는 구조에서는 아무리 좋은 정책도 정착되지 않고, 사람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도와주는 행정’이 아니라 ‘결정할 수 있는 주민’을 만드는 정치적 자율성이다.
이 자율성은 단지 투표나 회의의 문제가 아니다. 마을 공동체가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책임지고,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구조다. 이미 일본의 일부 소멸 위기 지역에서는 ‘지역 자치 법인’을 설립해 행정 일부를 주민이 직접 수행하는 모델이 실행되고 있고, 한국에서도 ‘마을기업’, ‘마을교육공동체’, ‘커뮤니티 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정치가 작동하는 마을이 점차 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지역개발이 아니라, 지방 소멸을 막는 민주주의의 회복이며, 사라지는 마을에 다시 ‘주체’를 만들어주는 본질적 해법이다. 남는 것은 땅이 아니라, 결정하는 사람이다.
맺으며,
지방 소멸은 정치의 부재에서 시작되고, 회복은 주민 자율성과 결정권의 회복에서 출발한다. 마을은 단지 행정의 단위가 아니라, 정치적 주체가 존재해야 하는 공간이다. 지금까지는 외부에서 내려오는 정책이 마을을 지배해왔지만, 앞으로는 마을이 스스로 정책을 말하고, 실행하고, 평가해야 한다.
지방 소멸의 반대는 ‘존재하는 정치’이며, 그 정치의 주체는 마을 주민 그 자체다. 말할 수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생존이다.